코드박스 서광열: "정신 차리기"까지 8년, 엔지니어에서 창업가로
코드박스 서광열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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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5. 9.
"'이 아이템으로 창업해야지' 라는 명확한 계기는 없었어요."
서광열 대표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지금은 1만 개의 기업이 사용하는 법인 운영 플랫폼 ZUZU를 운영하고 있지만, 창업의 시작은 어쩌면 '만들고 싶은 것이 있어서'에 가까웠습니다.
코드박스라는 법인명으로 창업을 하고 코드체인을 거쳐 지금의 ZUZU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8년간 수 차례 피봇(Pivot)을 거쳐 마침내 PMF를 찾기까지,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엔지니어에서 창업가로 거듭난 방법이요? 저는 '정신을 차렸다'고 표현하고 싶어요(웃음)."
그는 지난 8년의 창업기를 엔지니어가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시작한 창업
"그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요."
서광열 대표에게 창업과 취업의 경계는 처음부터 모호했습니다. 병역특례로 한 벤처 기업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한 후, 계속 스타트업의 초기 멤버로 일해왔거든요.
"졸업 후 3번째 멤버로 들어간 회사부터는 회사와 내 정체성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이건 내 회사가 아니고 언젠가는 창업해야지'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요."
그러던 그는 CTO로 7년간 일했던 회사에서 부침을 겪으며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참에 태국에서 한 달 간 쉬며 앞으로 뭘 하고 살지 고민해봤지만 결론은 뻔했습니다.
"제 커리어 전체가 소수의 사람이 있는 회사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사업을 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게 회사가 된 것 같아요."
그렇게 시작한 첫 번째 아이템 '코드박스'는 개발자들이 코드를 온라인에 공유하고 다른 사람이 실행해볼 수 있는 협업 도구였습니다. 제품을 만든 후 정부의 예비 창업자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럽게 법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창업 초기엔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2018년 초, 블록체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비트코인이 오르고, 거래소가 생겨나던 시기였어요. 엔지니어인 서광열 대표도 이 새로운 기술에 매혹됐습니다.
"저도 엔지니어로서 이 새로운 기술에 관심을 가졌어요. 기존 아이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시들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다른 것을 한 건 아니에요. 코드박스의 컨셉을 이더리움의 스마트 컨트랙트를 잘 만드는 프로젝트로 바꿨습니다."
2018년 1월, 이 아이템으로 카카오벤처스와 두나무에서 시드 투자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투자를 받은 뒤 서광열 대표의 호기심은 또 다른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개발 툴만 만들 게 아니라 블록체인도 한 번 만들어보자!' 역시 제 개인적인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진지한 사업 아이템이라기보다는, 통장에 돈도 넉넉하니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코드체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전형적인 엔지니어의 함정이었다고 서광열 대표는 스스로 평가합니다.
"엔지니어들이 하는 창업의 특징인 것 같은데요, '이런 툴이 있으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일단 만들어봅니다. 그 다음에야 이 제품이 쓰일 곳을 찾는 세일즈 마케팅을 떠올려요."
"기술이 좋은 건 알겠는데 사업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전환점은 투자 과정에서 심사역들에게 받은 질문들이었습니다.
"거듭되는 챌린지에 본격적으로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PMF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전에 제 관심사가 바뀌곤 했어요. 고객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는 않았죠."
코드체인으로 게임 아이템 거래소를 시도해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임 회사와 접촉했을 때 새로운 기술에 관심은 보였지만, 실제로 세일즈가 되고 매출이 잡히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예상보다 보수적이더라고요."
새로운 시도인 STO(Security Token Offering) 사업 역시 비슷했습니다.
"라이센스를 받고 제도적으로 준비되어야 할 게 많았어요. 결국 사업 추진이 제가 원하는 시간이나 속도에 맞지 않았고, 독자적인 생존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미국에서 발견한 힌트
코드체인 기술을 잘 활용할 방법을 찾던 중 '캡 테이블 매니지먼트 소프트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주 명부. 투자를 받으면 캡 테이블이라 부르는 주주 명부가 변동되고 계속 관리돼야 하죠.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회사들이 손으로 직접 관리하지 않고 카르타(Carta)나 셰어웍스(Shareworks) 같은 툴을 활용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미 수요가 있는 아이템을 찾은 거죠. '코드체인의 기술을 활용해 한국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캡 테이블 매니지먼트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게 ZUZU의 시작이었어요."
사실 ZUZU는 팔기 위해 시작한 서비스가 아니었습니다. 코드체인의 데모로 ‘코드체인이 이런 데도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토이 프로젝트에 불과했어요. 가볍게 만들다 조금씩 발전시켜 시장에 정식 출시하게 된 것이죠.
결국 실행해봐야 아는 것 “모든 방법을 다 해봤습니다”
ZUZU를 시장에 내놓을 때 서광열 대표는 직접 세일즈가 아닌 콘텐츠 마케팅을 선택했습니다. 여전히 엔지니어였던 그는 고객을 직접 만나기보다는 어떻게 이 서비스를 만들게 됐는지와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글로 설명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죠.
"ZUZU 서비스를 런칭하기 6개월 전부터 ZUZU 블로그를 운영했습니다. '스타트업이 주주총회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글을 쓰면 검색에 걸리잖아요."
물론 콘텐츠 이외에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브로셔를 만들어요. 그 다음 신규 법인 주소가 신문에 나오면 그 주소를 모두 수집해 실제로 우편을 보내거나, 테헤란로와 팁스타운 같은 스타트업 밀집 지역을 돌아다니며 직접 우편함에 꽂기도 했어요."
"네이버 지식인에서 주주총회나 법인 등기에 관한 질문이 보이면 일일이 답변을 달고, 경영 지원 매니저들이 많이 활동하는 카페에 가입해서 답변을 달았어요. '주주라는 서비스가 있으니 써보세요'라고요."
유료 광고도 당연히 해봤습니다.
"클릭 한 번에 몇천 원씩 나갔는데 사용자가 들어와서 그냥 스쳐지나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효과가 얼마나 있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네요."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습니다. 이후 숫자로 보니 유입의 대부분이 콘텐츠였고, 비용 대비 효과도 가장 좋았습니다. 그렇게 ‘ZUZU 하면 콘텐츠’가 떠오를 정도로 콘텐츠는 ZUZU의 주요한 마케팅 전략이 되었습니다.
PMF를 찾은 순간을 ‘손맛’이라 표현한다
ZUZU를 처음 출시했을 때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온라인으로 주주 명부를 관리하고 직접 변경 사항을 입력하는, 구글 스프레드시트를 주주 명부용으로 특화해 만든 정도였어요."
하지만 주주총회나 이사회, 등기 같은 업무를 지원하는 기능이 추가된 시점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우리가 큰 PMF는 아닐지라도 작게나마 시장의 한 지점을 건드렸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치를 느끼고 있구나'를 알게 됐어요. 그런 느낌이 없었다면 주주를 계속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낚시로 치면 손맛을 느꼈기 때문에 계속 만들게 됐죠."
그 손맛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용자들이 들어와서 주주 명부를 등록하고 실제로 주주총회 의사록을 만드는 등의 활동이 관찰되었어요. 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다른 대표들에게 '여기 좋더라, 써봐라'라고 추천하더라고요.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더 많은 유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고객인 회사를 수동으로 등록해야했어요. 그 일을 하느라 다른 업무에는 손도 못 댈 만큼 유저가 빠르게 늘어나는 걸 체감했습니다."
서광열 대표는 이를 완벽한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PMF를 찾으면 모를 수가 없어요. PMF를 못 찾았을 때는 오르막길에서 큰 돌덩이를 밀고 있는 느낌이거든요. 계속 힘을 줘서 밀어도 잘 움직이지 않고, 조금만 힘을 빼면 도로 밀려 내려오는 거예요. 반면에 PMF를 찾았을 때는 비탈길에서 미는 것 같아요. 조금만 힘을 줘도 알아서 굴러가는 거죠."
피봇은 서서히 일어나기도 한다
코드체인에서 ZUZU로의 피봇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ZUZU를 해봤는데 괜찮더라. 여기에 올인하자. 코드체인은 내일부터 안 한다' 이렇게 선언한 적은 없어요. 피봇은 한순간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서서히 자연스럽게 이뤄지기도 하더라고요."
실제로 ZUZU를 처음 시작할 때는 파트타임 1명 배정이 전부였다고 말합니다.
"지금 저희 세일즈 리드님이 당시에는 대학생 인턴이었어요. '이 사이드 프로젝트는 네가 해봐라'고 한 게 ZUZU 처음이었죠."
"작게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만들다 보니 '이것도 있으면 좋겠다, 저것도 있으면 좋겠다' 하면서 규모가 커졌어요. 출시 후 실제 고객 반응과 요구사항이 생기면서 코드체인에서 리소스를 조금씩 옮기게 됐습니다."
"고객의 말을 그대로 듣지 마세요"
ZUZU가 성장하면서 서광열 대표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고객이 하는 얘기를 듣는 게 메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소프트웨어는 기존에 일하던 방식과 똑같지 않기 때문에, 더 좋은 방식이라도 익숙하지 않아 느끼는 불편함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특정 분야 전문가들은 자기가 소프트웨어도 잘 설계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개인투자조합 결성 서비스를 떠올려 볼까요? 조합 규약에는 바꿀 수 있는 옵션이 수백 개나 있어요. 도메인 전문가는 그 수백 개의 옵션을 유저에게 모두 선택지로 주려는 경향이 있어요. 모두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좋은 UI/UX는 사용자가 굳이 모든 것을 선택하지 않아도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돕는 것일 수도 있죠."
그렇다면 ZUZU는 어떻게 접근했을까요?
"우리는 문제를 풀 때 우리 엔지니어나 제품 디자이너들이 해당 도메인을 전문가 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대전제로 시작합니다. 그래야 문제에 적합한 솔루션을 만들 수 있어요."
"제품을 잘 만드는 것과 도메인을 잘 아는 것은 같은 게 아닌데, 한 쪽을 잘하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정신 차리기: 엔지니어에서 창업가로
"저는 '정신을 차렸다'고 표현하고 싶어요(웃음)."
서광열 대표는 자신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초반 1-2년 차 때는 투자자든 고객이든 저를 만나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엔지니어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반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죠."
"'정신을 차린다'는 의미는 창업자가 만능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어떤 창업자든 처음 시작할 때는 특기 한두 개를 가지고 시작해요. 그런데 그것만이 창업을 하기에 충분한 역량은 아니거든요."
"슬랙에 남은 8년치 기록을 돌아보면 제 말투가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8년 전에는 훨씬 날카롭고 직설적으로 소통하며 상대방의 잘못을 꼬집어 지적했다면, 지금은 내가 이 얘기를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지도 알게 됐어요."
그럼 시계를 거꾸로 돌려 창업하던 시기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저는 엔지니어링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아요. 처음의 저는 90점의 기술 개발을 95점으로, 99점으로 만드는 게 너무 중요했던 사람이었거든요. 이제는 기술 이외의 지점에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할 것 같아요. "
"그러려면 더 큰 전제로, 내가 풀고 싶은 문제가 명확해야 해요."
결국 "생계형 비전"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서광열 대표는 후배 창업자들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창업은 최소 10년짜리 베팅이라고 말하는 편입니다. 직장은 맞지 않으면 1-2년 만에도 옮길 수 있지만 창업은 다르거든요. 제대로, 잘 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리리라 각오해야 해요."
"인생의 8분의 1을 쓰는 결정이잖아요. 정말 치열하게 고민하고 풀고 싶은 문제가 없이, 그냥 막연히 어떤 기술이 하고 싶어서, 어떤 트렌드에 관심이 가서 시작한다면 과연 지속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문제 의식을 처음부터 가지는 건 어려울 수 있다고 합니다. 서광열 대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시작할 때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냥 엔지니어로서 호기심이 많고, 만들고 싶은 기술이 있어서 시작한 거거든요. 그런데 하다 보니 어려운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왜 이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창업을 해야하나, 그 답을 찾아야만 하겠더라고요."
그는 이를 '생계형 비전'이라고 표현합니다.
"어쨌거나 창업을 시작했다면 나아가야 하잖아요.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비전이 필요한 거죠. 스스로를 세뇌해서라도 내가 이 힘든 고통을 참는 이유를 찾아야 해요. 결국 내가 풀고 싶은, 꼭 풀어야만 하는 큰 문제가 필요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30년 후의 ZUZU는 어떤 모습일까요?
"ZUZU는 시간이 필요한 서비스인 것 같아요. 인프라에 가깝거든요. 깔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번 자리 잡으면 후퇴하기 쉽지 않죠."
"30년 후에는 ZUZU라는 서비스의 저변이 확대되어 전 산업에 퍼져있을 것 같아요. 지금 창업하시는 분들은 ZUZU를 쓰실 거고, 30년 후에는 그분들이 회사를 계속 경영하고 계실 테니 다들 ZUZU를 쓰고 있지 않을까요?"
서광열 대표의 인터뷰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정리해보았습니다.
"만들고 싶어서" 시작하는 창업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시장이 필요한 문제를 풀어야 지속 가능해요. 물론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합니다.
PMF는 몸으로 느껴집니다. 오르막에서 돌멩이를 미는 것과 비탈길에서 미는 것만큼 차이가 나요. 여기 저기에서 추천이 일어나고, 감당하기 힘들 만큼 바빠지는 걸 체감할 수 있어요.
피봇은 점진적으로 일어기도 합니다. "내일부터 이걸 합니다" 같은 선언적 변화가 아니라, 리소스를 조금씩 옮기며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했어요.
고객의 말과 행동은 다릅니다. 고객 혹은 도메인 전문가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구현하면 기존의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거나 되려 복잡한 결과물이 나와요. 제품 관점에서 정제된 솔루션을 제시해야 합니다.
"정신 차리기"는 시간이 걸립니다. 어쩌면 창업은 창업자가 만능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과정이에요.
"생계형 비전"이 필요합니다. 10년짜리 베팅을 견디려면 꼭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어야 해요. 스스로를 세뇌해서라도 말이죠.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황에서 돌멩이를 밀고 계신가요? 오르막인가요, 비탈길인가요?